통섭에서 인용합니다. (130p)

과학자들은 융통성을 갖고 생각한다. 예컨대 그들은 모든 것을 임의대로 작은 부분들로 나누면서도 개념, 증거, 유관성, 연결성, 분석 등을 늘 염두에 둔다. 한때 개념 형성의 복잡성 문제에 천착하기도 했던 노벨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에 따르면

"창조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뚜렷이 구분짓는 특성은

(1) 창조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모호하게 정의된 문제 진술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점진적으로 구조화하며,

(2) 상상한 기간 동안을 그 문제들에 천착하고,

(3) 그 문제들과 관련되거나 잠재적으로 관련된 분야들에 관한 배경 지식이 풍부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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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21:57 2009/04/16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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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즐거움

가끔은, 연구를 진행하다가 매우 기쁜날이 있습니다.

저를 가르치시는 이교수님의 표현을 빌면, 지적 오르가슴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요, 여러 분야의 글을 두루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자신만의 insight가 맞다는 것을 밝혀주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날때 희열을 느낀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의 자극과, 특히 교수님께서 끈질긴 질문을 했기 때문이지만, 오늘 그런 지적 즐거움을 하나 느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영어표현의 Thrilled 가 어떠한 느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정말 거대한 파도 앞에서 조개 껍질 하나를 주웠습니다. 이제 그 조개 껍질이 무엇을 말해줄 것인지 귀를 대고 조용히 들어보아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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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21:40 2009/04/1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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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후배가, 석사과정을 통해 디자인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끔은 저도 그게 의구심이 들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석사과정을 선택하는 학생들은 학부과정에서 못다한 지식의 갈증을 충족시키기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석사과정에서 학부과정에서 얻지 못한 걸 채워줄수 있는가 하는 점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제 경험을 토대로 보면, 석사과정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깊이있는 지식을 얻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커리큘럼이 잘 짜여진 카이스트 같은 곳은 정말 심도 깊은 연구와 지식을 학습하는 장이긴 합니다만, 모든 석사과정이 그럴까요? 제가 만나본 사람들에 따르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더욱이 의학도 아니고 건축이나 이공계처럼 다양한 실험을 기반으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디자인 분야야 석사를 한다고 해서 더 깊이 있는 디자이너가 되는건 더더욱 아니지요.

특히나 디자인 분야가 아닌 사람들이 디자인 분야에서의 석사공부 [좀 심한 표현으로 디자인 석사 자격증이라고 하더군요]가 왜 필요하냐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 제가 있는줄 몰랐던 모양입니다.

한편, 디자인 석사 혹은 박사의 무용론을 갑자기 들고 나와 그것이 맞다고 하며 자신의 무식함과 얄팍함을 드러내는 후배의 용기도 용기지만, 이공계쪽에서 더욱 그러한 인식이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본 블로그에서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연구와 석사 혹은 그 이상의 박사과정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이에 대한 고찰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접근 방향을 설정해 보았습니다.

디자인 분야에서의 석사 혹은 그 이상의 연구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이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에게 과연 석사학위 혹은 그 이상의 학위는 필요한가?

1. 석사학위는 무엇인가? 디자인에서의 석사학위는 무엇인가?

2. 이러한 석사학위를 얻은 후, 어떠한 장점이 있는가?

3. 장점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저는 약간 질문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1. 석사학위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석사 연구를 디자인에 관하여 연구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디자인에 관하여 석사연구를 한 것이 어떠한 장점이 있는가?

3. 석사학위 이상의 디자인 분야 연구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이렇게 바뀝니다.

제가 이렇게 질문을 바꾼 이유는 석사 혹은 박사의 학위라는 것은 공통적인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딴 것이지, 디자인이 석사학위를 따도록 해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보통 학생들이 생각하는 큰 착각중 하나입니다. 학위를 주는 것은 그 능력에 대한 것이지, 무엇에 대하여 했느냐가 아닙니다. 따라서 질문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선, 석사학위는 어떠한 연구 노력에 대한 댓가이자 하나의 증명서입니다. 이 사람은 적어도 연구과정을 수행하였으므로,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초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연구 행위라는 것은 수집한 데이터에서 일관성을 발견하여 정보를 생산하고, 그 정보와 기존의 지식을 재결합하여 의미있는 지식을 생산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정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현존한 지식체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디자인 작업 자체를 하는 것이 아니므로 석사학위로 얻을 수 있는 기술은 '디자인 분야'에 적합한 '연구'가 되겠지요. 이때 주의점은 절대 석사 학위는 주체가 전공이 아니라, 연구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석사과정에 입학을 하는 것은 꼭 디자인전공 학생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위 학벌세탁이라고 할만한 현상, 지방의 디자인 학과 학사를 하고 나서 홍대 시디과 석사를 하는 것은 말그대로 디자인 능력이 홍익대학교 학생과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방대 학생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현실이 그러하니 그대로 쓰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석사학위를 하는 것만큼은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함께 졸업한 동기들과 동등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하고, 그리고 그 능력은 절대 디자인 능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문제, 석사연구를 디자인에 관하여 연구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풀어봅시다.

석사학위는 연구를 할수 있는 능력의 검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디자인 분야에 있어서 연구는 무엇일까요? 어떠한 부분을 들어 연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점은 굉장히 오래된 디자인 분야의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디자인 행위자체가 규정하기 힘든 것이고, 범위를 잡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의 정의만 사전에서 찾아보아도 매우 다양한 의미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석사 연구는 자신이 전문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그 부분의 함의적 의미에 국한을 두는 것이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편집디자인은 그 디자인의 의미가 공업디자인이나 엔지니어링 디자인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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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1 13:45 2009/03/2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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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자격시험 평가

지난주에 있었던 박사 연구에 대한 자격시험의 크리틱을 듣고 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연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혹독한 사문을 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반면에 먼저 연구를 진행한 선배꼴 되는 교수님들의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남은시간이 2년정도인데,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가진 시간과 정력을 고스란히 바쳐도 참 어려울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무서워졌습니다.

그래도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 조금

씩 연구를 거듭해 보면 분명 더 좋아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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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16:02 2009/01/2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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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통섭 =2=

통섭 1

근래 다윈이 근거한 진화론이 한 갖  이론에 불과하다, 혹은 하나의 설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글을 종종 보게 된다. 올해가 다윈의 저서가 나온지 150년이 된 해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진화론 [혹은 창조과학]이 진화론의 기존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많은 주장을 이슈화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간혹 진화론과 같은, 많은 검증의 시스템들을 통해 철저히 검증된 이론이 비전문가, 아마추어 혹은 고등학교때 배운 진화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만을 학습한 사람들이 비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다시말해, 우리가 양자역학에 대해 비판하지 않지만, 진화론을 아무런 공부 없이 비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통섭이라는 단어도 앞으로 더욱 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난도질 당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통섭은 생리 심리학, 생의학 [이중에서 특히 생리심리학] 이 다른 학문들과 어울려 하나의 커다란 진리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과학을 재구성하는 것- 사실 재구성이라기 보다 각각의 학문에서 삐져나오는 공통분모의 질문들을 엮어 이해하는 수준이겠지만- 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김지하씨와, 도올 김용옥씨다.

이사람들이 주장하는 주요 비판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과학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으며, 그것 뒤에 넘실거리고 있는 우리도 모르는 그것이 바로 철학인데 [사실 이사람들이 말하는 철학이나 기에 대해 이해하기는 너무 어렵다. 오히려 과학을 그것으로 부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서양의 이원론적 방법으로 어떻게 이 심오한 세상들을 설명할수 있는가. 그런데 그것을 중심으로 통섭이라는 관점을 가지다니.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머 이런 말이다. 그 뒤에 있는 그 넘실거리는게 무엇이냐면, 김지하씨는 생태 …뭐라고 했고, 김용옥씨는 기철학이라고 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냥 내가 이해하기에 분명히 그런 주장은 잘못되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무엇이 있건 간에, 세상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이 0도에 얼음이되고, 100도에 끓는 것 처럼 아주 간단하고 널리 통용되는 그런 것. 그게 필요하다. 거기에 왜 물이 0도에 어느냐고 묻는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물이 어는 것이 어떠한 목표가 있어서인가? 아니다.

여기서 통섭의 한구절을 인용한다.  과학의 이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그는 비교적 적은 양의 글로써 정리했다.


이론은 그 다양한 의미 때문에 파악하기 쉽지 않은 단어이다. 일상적 맥락에서 이론의 의미는 애매함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주장이 “단지 하나의 이론일 뿐”이라는 말을 듣는다. 누구든 이론을 가질 수 있다. [중략] 심지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닭은 잡아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부두교의 사제들에게도 그런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일종의 이론이 있다. 이것은 재림의 징표를 목도하기 위해 아이다호의 하늘을 응시하는 천년왕국의 신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과학 이론의 경우는 어떤가?

혹자는 과학도 추측을 포함하기 땜누에 기초가 허약한 어림짐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입장이 바로 그런 것 같다. 어떤 이론이든 타당하며 흥미롭다는 생각. 하지만 과학 이론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 이론은 반례들에 직면하면 폐기되도록 특별히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왕 틀린 것이라면 빨리 폐기되면 될수록 좋다.

[중략]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언젠가 말했듯이 이론은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

양자전기역학과 자연선택에 근거한 진화론은 중요한 현상들을 다루는 거대 이론들 중에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 그 이론들이 다루는 존재들, 예컨대 전자, 광자, 유전자 들은 측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론의 진술들은 혹독한 비판과 수많은 실험 그리고 경쟁 이론의 끈질긴 문제 제기등을 통해 철저히 시험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최고의 이론은 오컴의 면도날을 통해 판가름난다.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용어는 1320년대에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cam)이 처음 사용한 것인데, 그는 “전제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기 때문에 필요이상의 전제들을 사용하는 것은 헛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론을 판가름하는데 있어서 검약성은 좋은 기준이다. 군살이 없고 시험에 통과한 이론만 있으면 하늘에서 태양의 길을 안내하는 포이보스나 북녘의 숲을 가꾸는 드라이아드도 더 이상 필요 없다.

[중략]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해도 같은 현상이 나와야 하고, 그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분석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거나 반증되어야 한다.

둘째 기준은 경제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보를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것을 우아함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Elegant)

셋째 기준은 측정이다. 만일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척도에 따라 적절히 측정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일반화는 명확해진다.

넷째 기준은 발견 기법이다. 최고의 과학은 종종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후속 발견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은 원래 원칙의 진위를 다시 시험해 보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다섯째 기준은 통헙이다. 즉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서로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가장 경쟁력있는 설명이된다.

그는 설명도 참 엘레간트하게 끝냈다. 마지막에 통섭을 놓았는데 그가 통섭을 놓은 이유를 비추어보았을때, 이것은 단순히 다른 영역의 연구를 맞물리게 한다기 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의 보편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더욱더 과학자들에게 덤벼드는 비전문가들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배운 지식정도이고, 그것도 누군가가 새로운 이론이다 라고 하는 사이비에 의해 그르쳐진 것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아직 우리 한국에는 말잘하는 과학자가 적다는 것이다. 늘 공부하고 자신이 아는 분야에만 매진하다 보니, 그것을 누구나 알기쉬운말, 문학적으로도 엘러건트한 언어들로 꿰멜수 있는 사람이 참 적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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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19:52 2009/01/13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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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글쓰는데 겁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하다 보니, 글쓰기의 기초가 불분명한 어설픈 글들을 게속 쓰게 됩니다. 일단 3000자 요약은 어떻게든 만들었는데, 그게 참 읽기 힘든 글이더군요. 제가 저자인데도 말이죠!. 

남의 글을 읽을때는 참 쉽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글쓰기의 밥로스씨인지...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표현이 참 다양한데, 

그중 90%는 짜증인것 같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굽신 굽신. 

이렇게 블로그에 쉽게 쉽게 글쓰듯 논문 쓰는게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고 보니 글쓰기에 관한 책 참 여러권을 사두었는데, 면밀히 들여다 본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책꽂이에 있던 [영어로 논문쓰기]라는 책을 덥석 집어보니 제가 그동안 고민하던 내용들이 있어서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은 그 글들을 보면서 제 글들을 재정리하고 있습니다. 얼른 끝내고 잠을 좀 자야겠습니다. 

Posted by up4201

2009/01/11 23:26 2009/01/1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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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이 글쓰기...

요즘 근황입니다. 

박사 자격시험을 준비하느라 매우 바쁩니다. 원래 책도 잘 안읽는데, 어디서 읽은 적 있는 글을 갖다가 붙여가며 그런지 아닌지 확인하려니, 글쓰는 시간보다 확인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더군요. 미치겠더이다. 

글쓰면서 느낀 것인데 3000자 쪼가리 쓰는데도 영문하나 맞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제 여친님께서 밤늦게까지 제 외계어들을 읽고 고치는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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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그럴듯한 책을 쓰는게 꿈인데, 정말 꿈이 되었습니다. 아...영원히 오지 않을 그날이여.
올해는 그럴듯한 에세이나 저널 논문을 써 보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목표는 올해 2개의 저널과 3개의 컨퍼런스에 논문을 내는 것인데, 일단 2개 컨퍼런스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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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23:22 2009/01/1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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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김용옥의 비판이 있지만,
학업에 뜻이 있는 나로써는 그의 학자적 자질을 검토하며 써놓은 구절이 매우 마음에 와 닿았다.

세번째 이유는 올씨가 어린 시절 부터 불혹의 나이에 이르기 까지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대화하는 법을 배운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앞의 요인을 발생시킨 근원이기도 하다.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패배하는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 명로하지 못하고 주관적이어서 전달에 실패하거나 빈틈이 많이 반론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자신으 옳고 멋지다 믿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한심했다는 좌절을 느껴보는 것이 이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조심성을 배우고 엄밀한 준비성을 체득한다. 어떻게든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려 애쓸 것이며 생각이나 말을전개할 때 되돌아올 문제나 반론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게 될 것이다. 학문적 엄밀성과 예리함, 사고의 독창성과 풍부함은 여기에서부터 발생한다. 만일 이런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논리적으로 사고하거나 대화할 수 없다. 그것은 권투선수가 스파일과 실전경험 없이 혼자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과 섀도복싱만으로 챔피언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다.

맞는 말이다. 글쓰기는 쉬우나 남에게 비판을 받는 것은 정말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읽는 사람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고, 평가하는 사람은 글을 쓴 사람이 어떠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이해하고 비판할 수만 있다면 학문적 성숙이 이루어진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문단은 올씨 에 대한 김상태씨의 직격타 연속이다. 인신공격에 가까울 정도로 혼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연타는 계속된다.

도올은 [철학의 사회성] 이라는 글을 인하대학교 강당에서 '준계 철학 연구 발표회'에 참석하여 발표한 후 처참하게 비판을 당한다. 그는 그것을 나중에 도올 논문집이라는 책에서 그 일을 들먹이며, 그때 자리에 있었던 대학교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을 해댔다. 얼마나 비열하고 냄새나는 행동이냐.

격투기 시합은 몸으로 치고받기 때문에 살벌하다. 반대로 학술토론회장은 머리와 논리로 치고받기 때문에 살벌하다. 어느 쪽이 더 살벌할까? 학술토론회 강단에서 연사가 공격당하는 것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살벌함을 잘 모른다. 그래서 발표자는 조심스럽고 치밀해야 한다. 안 그랫다간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있다.
올씨는 이 사실을 모른다. 매일 자기 칭찬만 하는 사람들 혹은 전문가 아닌 대중이나 학생들에게 잘난 체만 했으므로 학술토론장의 무서움을 알 수가 없다.

글에 대해서도 김상태는 도올이 함량미달임을 갈파한다.
감강경강해라는 책에서 한부분을 발췌하여 도올의 글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신이라는 주부 속에는 이미 신의 존재성이 포함되어있으므로 그 질문은 근본적으로 성립 될 수 가 없는 것이다. 신이라는 말은 이미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수 있을 것이다.(금강경강해, 도올 김용옥)
 [중략]
가장 좋게 보아주었을때 올씨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의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을 역설하려 했을 것이다. 혹은 안셀무스나 버트란트러셀의 이론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신 개념에 관한 독특한 해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전제 없이 위와 같은 우격다짐을 부리는 건 곤란하다. 설혹 안셀무스나 버트란트 러셀이 온다 해도 기껐해야 그들의 한정된 의견일 뿐이다. 그런데도 올씨는 멀쩡한 대중과 독자에게 이와같은 우격다짐을 부리고 있다. 이 문장을 고등학생이 보았다고 가정해 보라. 그 학생은 몹시 괴로울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는 도무지 말도 안되는 것 같은데 유명한 학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니 오히려 자기가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것이다'라는 말은 견디기 어려운 야비함이다.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기'는 커녕,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것을 올씨는 이렇게 둘러친다. 이는 자신의 무지를 독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대단히 못된 술책이다.

할말이 없다.

먼 곳에서 도올을 욕하기 전에 내 스스로에게도 이러한 면은 없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부끄럽고 낯뜨거워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든다.
어설픈 공부로 인해, 더러운 방법으로 학자가 되었다는 말보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 또 무엇이겠는가.

Posted by up4201

2008/12/07 07:59 2008/12/07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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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촌철살인의 도올 김용옥 비판 [1]]

앞서 쓴 글에 이어 이 책에서 관심있게 읽은 부분을 발췌해둔다.

도올의 글을 먼저 발췌한다. 이 글은 자연의 파괴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4000년 동안 인간이 건드릴 수 없었던 성역이 40년 동안에 무너졌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의 에너지를 문명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식이 여태까지 인류의 문명사의 어떠한 방식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에너지의 전환이 바로 모든 에너지의 근원을 고갈시키고 파괴시키고 있다는 가공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란 천지의 에너지이며, 이 천지의 에너지란 곧 생명의 에너지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의 고갈이나 파기는 곧 생명의 고갈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 사막에 우뚝 서 있는 스핑크스나 피라밋은 한없이 신비롭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지구상의 문명의 소치라고 말한다면 지금도 풀 수 없을 정도의 어떤 문명에너지의 비약적인 형태를 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나일의 사막 위에 아무리 피라밋이 수백 개가 들어섰다 할지라도 지구 전체의 기상상태를 바괴시킬 만한 환경의 오염이나 생태의 변화를 초래한 바는 없다. 피라밋이나 만리장성은 인간의인위적인 장난의 극치라 말해도, 그것은 지금도 묵묵히 관광객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고요한 자연의 돌더미일 뿐이다. 그러나 63빌딩 하나가 저지르고 있는 하천의 오염은 결코 묵묵한 한강의 석양의 아름다운 반사로 가리워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은 아닌것이다.

이 원글에 대해 김상태는 이렇게 비판한다.

more..

more..

mor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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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와 같은 비판으로 나는 먼저 김상태씨가 왜 도올이 나쁜 사람인지 잘 지적해주었다고 생각하고, 관련 분야에 관해 무지로 점철되어있다는 것을 그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부분의 글로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 또한 나는 그의 이 부분의 글이 과학기술을 맹목적으로 호도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가 무엇인지 이야기 하고 싶을때 인용하기 적절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애가 타는 것은 환경오염이라는 문제가 광범위하고 복잡 다단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접근하는 소위 의식인들이 도올과 같이 문제를 매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점이다.

  • 깊게 생각할 힘이 없기 때문에 빨리 답을 내고 싶어하고, 표면적으로 보이는 그 과학기술이라는 해답을 들고 모든 일을 단순한 모습으로 성급하게 환원하는 그 조급증이 보이는 현상들을 모두 기만해 버리고 나름대로만의 논리로 포장해 버린다.

  • 과학기술만 없애고 그것으로 과거의 불편했던 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가 괜찮았다, 자연과 하나되는 사상이었다라고 외치는 그들. 그들에게는 정작 어떠한 부분이 잘못되고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적다.
  • 그들은 단순하다. 간단하게 말한다. 과학기술은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이기심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느 부분은 맞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으로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이기심을 버리라는 것은 맞지 않는 논리이다.

  • 인간과 자연과 살아온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종을 남기기 위해 투쟁한 역사다. 보다 생존할 가능성을 높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영리를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한 역사였다.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을 배려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자연과 동일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연속에 속해있으며, 과학기술은 그것을 분리해내기 보다는 인간이 살기 힘든 자연으로 부터 보호하는데 더 많이 활용되었다.

  • 자연을 의인화 시키지 말라.

Posted by up4201

2008/11/29 15:35 2008/11/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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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네이버를 검색하다 올해의 책 리스트에 오른 책 제목들을 보다가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도올 김용옥 비판에 대한 책이다.

어떠한 이유였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도올 김용옥선생이 신약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어떤 유명한 목사가 그를 친하게 대하다 욕을 먹기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그 사람이 가진 흥미라는 것이 단순한 수준을 뛰어넘는 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TV에 강의도 하고 가끔씩 정신이 번쩍 들정도로 제도권을 비판하는 말도 서슴치 않아 쇼맨십이 강한 인기인이겠거니 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진중한 학자의 면모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그를 비판하는 글도 있는 것 보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학계의 유명인사라고 생각했었다.

김상태씨가 쓴 도올 김용옥 비판은 내가 생각한 김용옥의 허상을 깨뜨려버리는 책이었다. 책 첫머리부터 그는 사깃꾼이고, 그가 한국의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한심스럽고 개탄할 만 하다고 하였다. 이사람 왜이렇게 독설적인가 하는 생각을 갖고 책을 계속 읽다 보니, 비단 김용옥 뿐아니라, 학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로써는 분명히 지키고 따라야 할 학자로서의 자긍심과 지속적인 노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게 하여 주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글을 써야 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글쓰기라는 것이 학문을 통해 새로운 지적 완성을 추구한다는 것 때문이다. 보통 일례로 산업현장 혹은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학문이라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소위 글만쓰는 사람으로써의 학문도 죽은 학문이며,

김상태씨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대중의 무지를 악용하여 자신의 인기를 구축하고 실존하지 않는 허구를 만들어 지성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현혹하고 꾀어서는 안된다.

김상태씨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도올은 분명한 사기꾼이고, 악랄한 사회 좀먹는 자다. 아니 비단 김상태의 노리만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도올도 자신이 생각하는 학자적 모습과 자신의 모습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아니 먼 거리에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던 것은 잠시나마 도올이라는 사람이 대단한 존재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 내자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시 한번 실증적 가치를 중시하는 학문인 디자인쪽에 있으면서도 그가 지적하는 위험한 지식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으로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가 썼던 논문들이, 물론 나 스스로도 그것이 부끄럽고 공개하기 민망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무엇때문에 비판을 받아야 하며 더욱 더 타인에 앞서 겸손해야 하는 것인지 깨닫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제 그의 글 몇가지를 인용하면서 내가 앞으로 나아갈 학자의 기본기를 어디서 얻어야 할지 되새김질 해보고 싶다.

Posted by up4201

2008/11/29 14:11 2008/11/2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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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증거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동안 나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신념이란 잘못된 것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내가 그른 것이 밝혀지면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1류가 되고 싶었다. 나는 2류가 아니다. 나는 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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